표면적으로 볼 때, 영국령 북미 식민지는 당시 대부분의 식민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권력도 종주국의 지방정부에 있었다. 이론적으로 런던은 총독 임명, 참사 임명, 세관 및 해사 법정 설립, 식민지 법률 심사 등 북미 식민지를 통제할 수 있는 다양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실의 방해로 인해 영국은 실제로 이런 권력을 실천할 방법이 없었고, 좀 더 현실적이고 쉽게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인 북미의 영국에 대한 상업적 의존과 경제적 상보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전향할 수 밖에 없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Northern Exposure (미국 TV 드라마), 성공명언)
당시 영국의 경우 북미 식민지에서 엄격한 경제통제와 느슨한 정치통제를 실시하는 것도 부득이한 일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국력이 약하고 정국이 격동하는 요인 외에도, 기술 문제는 런던이 식민지 정치를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막았다. 대서양 양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영국 본토와 식민지 사이에 정부 법령을 업로드하고 배포하는 것은 종종 무의미하다.
간단한 예를 들어, 1742 년에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 매튜 존슨이 영국 무역위원회에 공문을 제출했다. 결국 4 년이 지나서야 1746 이 되어서야 런던은 공문을 받았다. 그러나 1706 년에 런던은 식민지를 심사할 권리를 행사하여 뉴햄프셔 주 의회가 통과시킨 두 가지 사법법령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결정이 아직 식민지로 배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두 법령은 반세기 동안 계속 시행되었다.
영국의 식민지 정책은 항상 "식민지 내정에 거의 간섭하지 않고 인구 이동, 정부 원조, 유지 등에 거의 관심이 없다" 며 정부의 더 큰 관심은 "식민지 무역에 대해 더욱 엄격한 규제를 시행하고 국내 항구에 더 무거운 관세를 징수하는 것" 으로 제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