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은 점을 간략하게 설명해야 한다.
첫째, 정의는 도덕에 기반을 두고 있고, 정의의 판단은 사회의 주류 도덕에 의해 결정되지만, 합법성과 정의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변호사는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자신의 변호의견을 제시할 수 있을 뿐, 억울함을 씻거나 그 사람을 위해 변명하여 피해자 자신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을 뿐이다. 변호사의 직업윤리는 그에게 과도한 정의와 악이 아니라 의뢰인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둘째, 사회 정의를 지키는 것은 변호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형사범죄의 경우 입건은 공안기관, 기소는 검찰, 재판은 법원이다. 각 부서가 법정절차에 따라 엄격하게 사건을 처리하면 억울한 허위 사건은 적지만 법의 미비로 사회에 해를 끼치는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방치할 수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기본적으로 사회 정의를 지킬 수 있다! 이 가운데 검찰은 공소기관뿐 아니라 법률감독권도 갖고 있어 공안기관의 위법사건과 법원 재판불공정을 감독할 권리가 있어 공안에 검찰 건의를 제출하고 법원 판결에 항의할 수 있다.
셋째, 변호사의 생존 압력이 크다. 돈을 많이 버는 변호사는 주로 비소송, 주로 상장회사를 한다. 진정으로 형사사건을 크게 하는 변호사는 매우 적다. 설령 그들이 한다 해도, 평범한 작은 사건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을 수는 없다. 율소와 변호사는 비례적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변호사의 수입은 그들이 접수한 사건의 수와 금액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사람이 돈으로 죽고 새가 음식으로 죽는 것은 변호사에게 쓰는 것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고 현재 상당수의 변호사가 범죄 용의자에게 자백을 가르치고 증인이 위증을 하도록 촉구하는 등.
위의 세 가지 점에서, 나는 변호사가 정의감을 가질 수는 있지만 정의의 주체가 될 수는 없고 많은 제한을 받는다고 말하고 싶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정의명언)